1.
복기를 마쳤다. 복기하는 목적과 목표, 그리고 방법은 이러했다. 목적은 패인과 대안 찾기. 목표는 기출문제를 전체를 객관적으로 복기하고 주관적 복기하는 것. '객관적 복기'는 기출연계 정도를, '주관적 복기'는 내가 준비한 부분(챕터 혹은 문제)의 출제여부와 함께 출제된 문제의 답을 제대로 맞췄는지다.
처음엔 3일 정도면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왠걸, 하루 평균 10시간씩 5일 정도 걸린 것 같다. 과목당 하루를 쏟은 셈이다. 복기의 취지답게 틀린 문제에 그치지 않고 모든 문제, 모든 선지를 전면 재검토했다. 당시 시험치던 상황을 떠올렸고, 의욕적으로 시험치고 있는 나를 소환했다. 다행히 문제문제마다 왜 내가 이 답을 찍었는지, 왜 이 선지를 걸렀는지, 이 문제는 왜 헷갈렸는지가 생생히 재현됐다. 재시를 치는 듯한 느낌과 긴장으로 한 문제와 한 선지도 빼놓지 않고 복기해 나갔다.(무엇보다 망한 시험, 쳐다도 보기 싫을 텐데 그걸 뚫고 복기를 결심하고 실행한 것만으로도 내 자신을 칭찬해주고 싶다.)
2.
궁금했다. 내가 공부(준비)한 기출문제만로 정말 평균 6할 이상의 득점이 가능한지 말이다. 작년 시험까지 합치면 대략 8개년 정도의 양이었다. 물론 8개년의 기출문제 전부를 공부한 건 아니다. 버린 챕터와 문제가 있었다. (그것을 감안하더라도) 결론부터 말하면 합격이 가능했다. 그렇다면 내가 6할 이상의 점수를 획득하지 못한 이유는 단 하나다. 공부가 덜된 나의 문제라는 것. 그런데 이 발견은 굳이 그 빡센 복기라는 과정을 통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종류의 것이었다. 세상 모든 불합격자는 합격할 만큼의 정답을 찍지 못해서 떨어진 것이고, 그러한 이유는 정답을 찍을 만큼 공부가 덜 되었을 뿐이다. 순간 허탈했다. 그간의 노력이 날 배신했다는 생각 때문이다. 그렇다면 다음 스텝은 그저 이보다 더 노력하면 되는 것인가?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노력은 이 정도면 충분했다. 방향의 문제가 분명 있으리라 믿고 선지를 하나하나 다시 톺아보았다.
선지에 기호를 썼다. 먼저 기출여부를 기준으로 기출은 A, 미기출은 B로 나눴다. 그 옆에 윗첨자로 O,X를 표기했는데 내가 준비한 영역인지, 준비하지 않는 영역인지의 여부다. 마지막으로 준비한 기출문제에는 출제연도를 표기했다. 틀린 문제지만 준비한 문제(맞추었어야 할 문제), 맞은 문제지만 준비하지 않은 문제(틀릴 수 있는 문제)로 나눠서 재분류했고, 그 기준으로 정오 여부를 재판별했다. 그렇게 복기한 결과 이번 시험은 125문제 중 79개를 맞고 41개를 틀린다는 결론이 나왔다. 75개 이상부터 합격선이니 4개 차이로 합격하는 셈이다. 과목별로 보면 노1(+16), 노2(+20), 민(+19), 사(+13), 경(+11)이다. 내가 가장 이상적이라고 생각했던 개수였다.
3.
재검토한 부분에서 발견된 문제는 이러했다. 가령 나는 100을 준비했다. 근데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70밖에 안 들어 있었다. 그마저도 섣부르게 꺼내다 보니 잘못된 걸 꺼냈다. 아울러 있는 것도 바로바로 찾지 못했다. 심지어 나에게 없는 것인데 그걸 알면서도 열심히 뒤지고 있었다! 정리하면 패인은 크게 두 가지였다.
4.
첫째, 공부했는데 틀렸다. 공부했는데 틀리는 이유는 뭘까. 망각과 착각, 크게 두 가지 경우로 나눌 수 있겠다.
<망각> 공부할 당시에는 알고 있었지만 시간이 흘러 기억에서 잊히거나 흐릿해 진 것이다. 당시 많은 합격자들이 시도한 검증된 방법을 썼다. 회독이 더해질수록 아는 선지는 건너뛰고 모르는 선지를 남겨 반복하는 전략이 그것이다. 시험 당일 전과목 1회독이 가능할 정도로 봐야 할 양이 줄었다. 성공적이라 생각했다. 문제는 안다고 넘어갔던 선지에서 기억의 누수가 발생했다. 암기를 기반으로 한 다수의 법과목에서 이 문제는 심각한 결과를 낳았다. 민법을 치던 당시 낯설지 않고 편하게 다가왔던 건 이 때문일 것이다.(심지어 고득점을 예상하기도 했으니ㅠ) 당시에 보았고 알았던 내용이 분명하지만, 덜 훈련(반복, 숙지)된 나는 출제자의 덫에 속속 빠져들었고 심지어 마음만 급한 탓에 제 발에 걸려 넘어지기도 했다.
<착각> 공부할 당시에는 알게 되었다고 생각했지만, 실은 제대로 몰랐던 것이다. 혹은 암기가 되었다고 판단했지만 아니었다. 이해가 되었다고 판단했지만 아니었다. 검토할 때 첫 회독부터 알았다고 넘어간 선지들이 있다. 근데 다시 보니 이런게 있었나 싶을 정도로 생경했다. 특히 이해를 기반으로 한 경제학에서 이 문제는 두드러졌다. 제시된 문제의 소재가 달라지고 변수가 하나 추가되자 내 뇌가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고 멈춰버렸다. 해당 파트의 기본원리와 풀이법을 제대로 몰랐던 것이다. 그저 해설지에 담긴 풀이과정, 그리고 문제와 선지의 이미지가 익숙한 것을 안다고 생각한 것이다. 마치 도서관에 오가며 자주 눈에 띄었던 어떤 사람을 내가 잘 알고 있다고 착각하는 것과 유사하다고나 할까. 다른 장소, 다른 의상, 다른 메이크업 등으로 상황이 바뀐다면 대부분 그 사람을 알아채지 못할 것이다.
5.
둘째, 공부하지 않았는데 풀었다. 공부하지 않았는데 푼 이유는 뭘까. 이것도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현혹'과 '집착'이다.
<현혹> 맞출 수 있을 것 같다는 현혹에 빠진 상태. 이는 위의 망각 혹은 착각과 긴밀하게 연결된다. 공부 안한 혹은 안된 부분인데 공부했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공부했다면 반드시 맞춰야 하는 문제이기에 시간이 하염없이 흐르는데도 붙잡고 있는 모양새다. 이러한 경우는 해당 문제와 선지를 보고 내가 아는지 모르는지를 빠르게 판단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특히 해결할 수 있다고 여길 때 문제는 가중된다. 각 문제의 가중치가 1로 동일한 문제에서 특정 몇 문제, 혹은 선지에 발목 잡혀 시간을 흘려보내고 있는 것이다.
<집착> 맞추지 않으면 떨어진다는 집착에 빠진 상태. 풀 수 있는 문제를 다 풀고난 후 남은 시간으로 공부 안 한 문제 앞에서 이런저런 짱구를 굴리며 답에 가까운 것을 찍는 일은 지극히 합리적이고 합당한 자세다. 문제는 그 반대에 있다. 풀 수 있는 문제가 줄을 서고 대기 중인데 풀지 못하는 문제 앞에서 쩔쩔매는 모습. 왜 그럴까. 플랜B라는 전략의 부재에 있다고 본다. 이는 심리적인 전략의 부재를 의미한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만의 임계점을 갖고 있다. 절반의 물은 각 개인이 처한 상황, 그 상황에 따른 임계점에 따라 정반대의 해석으로 갈린다. 정수기 옆에서의 절반의 물과 절수 조치 중의 절반의 물은 다르다. 감당하기 어려운 임계점으로 내몰릴수록 조급함은 급증되지만 판단력은 급감한다. 이때에는 스트레스풀한 상황을 예상하고 이와 유사한 반복된 훈련을 통해 임계점에서의 대응책이 필요한데 당시 나는 플랜B를 세우지 않았다. 가령 이번 경제는 내가 준비하지 않은 챕터에서 많이 출제되었기 때문에 '과락만 면하자'는 전략으로 빠르게 선회했어야 했다. 즉 준비하지 않는 문제를 소거하는 전략이 아니라 준비한 것 10~11개를 찾아내어 정확하게 풀어내는 전략을 취했어야 했다. 그리고 빠르게 민법으로 넘어갔어야 했다. 그러나 풀 수 없는 문제 앞에서 쩔쩔매는 동안 시간을 35분 이상 썼다. 이 악영향은 다음 과목인 민법에 고스란히 이어졌다.
6.
위의 원인들로 인해 합격선의 기출범위 안에서 공부했음에도 획득하지 못한 문제의 개수를 세어봤다. 과목별 개수로 보면 노1(6), 노2(4), 민(12), 사(3), 경(7)이다. 할 수 있는 한 보수적으로(객관적으로) 체크했다. 도합 32개다. 이는 전체 오답 개수의 45%나 되는 양이다. 틀린 2문제 중에 1개 꼴로 놓친 셈인데, 여기서 무슨 노력을 논할 수 있나. 오히려 노력의 가치를 훼손하는 것일 게다. 이러한 결과 앞에서 내가 얻은 것은 노력의 부족, 배신, 무용이 아닌 오히려 노력의 방향, 방법, 지속이다. 틀어진 노력의 방향을 수정하지 않거나, 효율적이지 않은 방법으로 노력하거나, 일정하게 지속하지 않고 들쭉날쭉한 노력의 투입은 이번 수험뿐 아니라 그 어떤 일에서도(그리고 삶에서도) 통용될 영역은 없을 것이다. 건전한 노력의 가치마저 부인하고 부정하는 내가 되지 않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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