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감각한 고통과 연민에 대하여
<2021 독서대전 시민독후감>
홍은전, 『그냥, 사람』을 읽고
1.
책장을 덮은 뒤, 느껴진 감정은 분노나 처연함이라기보다는 답답함이었다. 이는 누군가를 짓밟아 이룩한 잔혹한 현실에 공감하고 공명하는 안타까움이 아닌 감각의 무지, 곧 무감각에 기인한 사전적인 차원에서의 답답함에 가까웠다. 그래서 책을 읽은 뒤 노트북 자판에 손을 얹을 수 없었다. 대한민국의 교육제도를 잘 지내온 덕택에(?) 책의 활자가 쏟아내는 내용들이 문자적으로는 이해할 수 있었지만, 책에 등장한 그들의 삶과 이들과 부대끼며 경험한 저자의 삶이 머릿속에 그려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저 이따금씩 나오는 충격적인 내용에 일시적으로 가끔 놀라고, 가끔 아플 뿐이었다. 허나 나의 살아온 이력을 돌아보면 그럴 만도 했다.
2.
나는 의학적으로 장애가 없는 비장애인 남성이다. 부모님의 지원과 나의 노력으로 대학을 나와 직장을 다녔고 현재는 노무사 자격시험을 준비 중이다. 또한 이성애자이며, 기독교인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어느 한 영역도 소수자에 속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하면 소수자의 일상과 삶을 조금도 경험해 본 적이 없다는 것과 같다. 저자가 주로 언급한 다양한 장애인과 화상 경험자, 그리고 세월호 참사 희생자와 그 가족들의 삶은 뉴스와 신문, 그리고 책으로 접했을 뿐이다. 그들의 보도는 나에게 사회 구조의 불합리함과 부정의를 가르쳐 주었지만, 단 한 번도 그들의 삶의 면면을 유심히 들여다본 적은 없다. 왜냐하면 나의 삶은 그들과는 다르며, 그리고 어쩌면 달라야 한다는 선민의식 같은 심리적 요인 때문일 것이다.
3.
그러한 무감각으로 점철된 앎과 삶의 분리된 인식에 균열을 일으키는 가히 혁명적인 사건이 발생했다.(분명 나에겐 그러했다.) 이 책을 읽은 지 며칠 뒤, 엄마와 나눈 다툼 섞인 대화가 그 발단이었다. 나는 부모님이 이끌어온 삶을 원망했다. 지독한 가난, 숱한 다툼, 가족문화의 부재 등 우리 가족은 다른 가족들과 상당히 달랐다. 특히 그중에서도 과거 가정폭력의 가해자임과 동시에 본인이 인지하지도 못할 정도로 당연한 가부장제의 권력과 횡포를 일삼은 아버지의 모습은 떠올릴 때마다 끔찍했다. 그러나 나를 더욱 힘들게 한 것은‘모성’이라는 이름으로 여성으로서의 정체성을 내던진 채 오로지 여편네로 살아온 엄마였다. 엄마와 대화 중에 푸념 섞인 내용이 나오면, 나는 서두에 밝힌 답답함과는 다른 자칭 지성적인 앎의 차원에서의 답답함을 느꼈다. 즉 이러한 삶의 선택은 오롯이 엄마의 몫이었다는 논리였다. 온갖 화려한 비유와 수사를 섞어가며 엄마의 나약함과 어리석음을 설파했다. 아버지에 대한 지탄도 물론 빼놓지는 않았다.
4.
그러나 문제는 내가 엄마의 삶을 경험적으로, 아니 이성적으로도 감각할 수 없다는데 있었다. 엄마는 남성들이 득실한 우리 집에서 단연코 소수자였다. 가부장제의 권력은 철옹성과 같았다. 고부갈등은 너무나 낭만적인 단어였다. 할머니는 숨 쉬는 일상과 같은 가부장제를 수호하는 전사였다. 할머니의 이간질, 아버지의 폭력과 폭압, 두 삼촌들의 야욕 섞인 분탕질까지. 그렇게 35년을 살아왔다. 가방끈까지 짧은 엄마에게 여성의 언어란 있을 수 없었다. 남성의 언어에 대항하면 그것은 반역이었고, 처단은 확실했다.
5.
나는 모든 사실들의 일부만 들었다. 그 일부의 이야기들 속에서 나의 무감각한 고통과 연민을 분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내가 답답하게 느꼈던 것은 저자의 말처럼 현재 내가 할 수 없는 것에 대한 굴욕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난 이제부터 그 굴욕감을 제대로 배우려고 한다. 그래야 혁명을 빙자한 개선이라도 가능할 테니. 이 책의 내용을 잘 간추려서 엄마에게 들려주고자 한다. 엄마는 분명 나보다 훨씬 넓고 깊은 차원의 감각으로 고통과 연민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것이라 믿는다. 그렇게 앞으로도 엄마의 삶에 공감하고 공명하는 내가 되길 바라며.
| #12. 넷플릭스 <지옥>에 관한 기독교적 고찰 (1) (0) | 2021.11.30 |
|---|---|
| #11. 물왕멀 밀키트 이용 후기 (1) | 2021.11.12 |
| #10. 기도문(21.11.) (0) | 2021.11.07 |
| #9. 공허한 질문, 따듯한 답문 (0) | 2021.10.29 |
| #8. 영화 <더 테이블> (0) | 2021.10.28 |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