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간만에 넷플릭스로 영화를 봤다. 선택 기준은 2가지. 런닝 타임이 짧을 것, 그리고 일상의 소재를 다룬 단조로운 설정일 것. 사실 평소 영화를 즐기는 편은 아니어서 나만의 별난 취향은 딱히 없었지만 그날은 괜스레 두 조건이 맞는 영화를 찾고 싶었다. 그 이유는 아마도 두 시간이 훌쩍 넘는 영화 시간은 그 자체로 알 수 없는 심적 부담을, 개연성 있는 시놉시스와 캐릭터 및 장르 설정이 명확한 명화는 단조롭고 어수선한 내 일상을 질책하는 것 같았나보다.
2. 넷플릭스 알고리즘이 친히 추천해주는 리스트 사이로 특정 포스터 이미지 하나가 시야에 걸렸다. 2017년에 개봉한 김종관 감독의 <더 테이블>. 감독은 누군지 몰랐지만 출연한 배우들은 걸출했다. 특히 여배우들 라인업이 환상적이었다. 러닝 타임은 1시간 12분에 장르는 드라마, 조건에 딱 맞는 영화였다. <지나가는 마음들>이라는 부제와 함께 "당신은 오늘, 누구와 만나 어떤 이야기를 했나요?"라는 줄거리 속 메시지가 눈에 띄었다. 설정은 단순했다. 하루 동안 한 카페, 한 테이블에서 일어난 네 번의 대화를 담백하게 담아냈다. 즉 네 가지의 이야기가 있는 옴니버스 영화다. 카페를 찾은 두 사람의 관계는 오직 대화를 통해서만 유추할 수 있다.
3. 첫 번째 대화는 과거 사귀었던 사이인 남녀의 이야기다. 간만에 만난 두 남녀, 사무직 공무원인 남자와 달리 여자는 선글라스와 마스크를 끼고 다녀야 하는 유명 배우가 되었다. 격세지감을 느끼며 만나게 되는데, 과거의 추억을 회상하며 어떤 소회를 나누고 싶은 여자와 달리 남자는 유명 배우가 된 여자를 그저 신기해하며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는 모양새다. 지나가는 두 여성 팬이 여자에게 다가가 싸인과 사진촬영을 요구하는데 남자는 에둘러 정중히 저지한다. 이윽고 아니나다를까 남자는 여자에게 찌라시 류의 난처한 질문과 함께 동료들에게 인증을 위한 사진촬영을 요구하게 된다. 과거의 순수했던 추억 나눔을 기대한 대화는 어느새 목적을 상실하게 되고 입바른 인사와 함께 헤어진다. 두 배우의 감정 변화가 인상적이었는데, 처음에는 엇비슷한 설렘의 감정으로 시작하여 막바지로 갈수록 대화의 향방이 엇갈리게 되면서 드러나는 상반된 감정이 스크린에 잘 포착됐다.
4. 두 번째 대화는 딱 세 번 만났지만, 갈 때까지 다 간 남녀의 이야기다. 몇 달 간 해외 여행을 간 남자가 한국에 돌아온 뒤 여자에게 연락해 만났다. 여자는 한 달 전 이직했다. 음식 잡지를 만드는 회사에 에디터로 들어갔는데 월급은 얼마 안 되고 야근은 잦지만 본래 하고 싶었던 일이다. 남자는 회사를 짤린 뒤 휴식 반 도피 반으로 해외 여행을 가게 된 건데 다시 먹고 사는 일을 고민하고 있다. 여하간 반가운 마음이 한 가득인 남자와 다르게 여자는 어딘가 어색하다. 그리고 남자의 말투에 불편함을 느낀 여자는 감정이 점점 격화된다. 짧지만 굵었던 세 번의 만남에도 불구하고 몇 달 동안의 여행 내내 연락 한 통 없었던 남자에게 속이 많이 상한 여자는 두 번이나 자리를 박차고 나가려고 한다. 남자는 연신 여자를 붙잡게 되고 체코에서 산 수동 태엽 시계를 선물하며 고백한다. 이어서 남자는 집에서 파스타를 해주겠다며 속이 훤히 보이는 제안을 한다. 첫 만남부터 속도가 참 빨랐던(?) 남자는 마지막까지 비슷한 형식으로 여자의 마음을 얻는다. 한결같이 능청스러운 남자와 복잡하고 마음의 여유가 없어보이는 여자의 심경이 생생하게 표현됐다. 흥미로웠던 것은 대화 중반부까지 두 남녀의 관계 양상이 명확히 드러나지 않고, 여자가 연상이라는 점이다. 대화를 미루어보면 30대 중반 정도로 추측되는 데, 세 번의 만남 동안 짧고 굵게 서로의 모든 것을 다 경험한 사이였기에 남자를 향한 여자의 분노에 가까운 섭섭함은 충분히 이해됐다.
5.세 번째 대화는 가짜 모녀로 위장하기 위해 결혼 사기로 만난 두 여자의 이야기다.
6. 네 번째 대화는 결혼을 앞둔 여자가 남자에게 바람필 것을 제안하는 은밀한 남녀의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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