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넓고도 좁다'는 말이 있다. 굳이 근현대 과학기술의 산물인 비행기, 인공지능 따위를 떠올리지 않아도 내 몸의 분신, 스마트폰만 보면 단박에 동의할 수 있을 것이다. 허나 '나이'에 비해 여러가지 면에서 미숙하고 어수룩한 내게 있어 세상은 그야말로 넓고도 넓었다. 경험이 부족해서인지는 몰라도 확실한 건 '이해되지 않는 것들이 많아서'일 것이다.
지난주 퇴원했던 아버지는 실밥 제거를 위해 병원에 갔다가 돌연 재수술 판정을 받게 됐다. 엑스레이로 살펴보니 철심이 끊어졌기 때문이다. 실밥이 터진 것이 아니라 팔꿈치의 골절된 뼈를 잇는 기둥 같은 철심 말이다. 솔직히 내 상식 안에선 이해하기 어려웠다. "아니 철심이 끊어지다니, 혹시 내가 생각한 철심은 나사 같은 것인데 그게 아니라 내가 알지 못하는 가늘고 유연한 신소재 같은 건가". 아버지의 수술을 담당한 정형외과 의사는 내 추측대로 유연한 특수 의료용 소재로 접골술을 진행했다고 말했다. 빠른 회복과 일상의 복귀를 감안할 때 이러한 처치 방식이 요즘의 추세라는 설명도 덧붙였다. 무엇보다 아버지의 재수술은 굵은 철심이 아닌 그것들을 연결한 팔꿈치 쪽의 얇은 철심의 문제이므로 첫 수술에 비해 쉽게 끝날 것이며, 그에 따라 수술비용도 크게 부담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결과적으로 의사는 본인이 말한 것처럼 집도하지 않았다. 가벼울 것이라는 수술 시간은 처음과 같은 시간이 소요됐다. 그 이유인즉슨 '막상 살펴보니 좀 더 꼼꼼하게 해야 할 것 같아서'라는 애매한 답만 돌아왔다. 물론 집도의의 판단에 따라 수술 전 계획과 집도 과정은 다를 수 있다. 그러나 첫 수술 이후 부가적인 문제로 인한 재수술이었고, 담당 의사는 엑스레이를 들이대며 문제 지점과 대처 방안을 내놓은 상황이었다. 무엇보다 재수술 전, 책임 규명 차원에서 고민 혹은 의심한 것이 있었다. 바로 철심이 끊어진 까닭이 아버지의 과실인지, 집도의를 포함한 병원 측의 실수인지 여부였다. 책임 규명은 환자 입장에서는 실리적인 것이기도 했다. 재수술과 입원에 대한 '병원비 부담'과 직간접적인 연관이 있기 때문이다.
재수술의 소식을 들었을 땐 단순히 아버지의 과실로만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첫 사고의 경우 여러 정황상 뺑소니가 아닌 아버지의 불찰로 일단락되었고, 퇴원 후 아버지는 외출을 제외하고는 종종 반깁스를 고정하기 위해 목에 거는 보호대를 풀고 지내셨다. 그 외 아버지 특유의 '덜렁댐'도 한몫했지만 무엇보다도 사고 난 오토바이가 아파트 수거함 쪽에 있었는데 깁스한 채로 그 무거운 것을 원래 놓던 자리에 옮겨 놓았다고 한다.
그러나 집도의의 다소 의외인 언행 불일치를 보고 나니 괜한 의심이 피어났다. 법률 용어인 귀책사유는 크게 고의와 과실이 있는데, 고의는 배제하더라도 집도의의 과실 또한 충분히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집도의의 이력을 살펴보니 지방 의대를 졸업해 종합병원에서 정형외과 전공의를 수료한 뒤 10년 넘게 근무했다. 본 병원에는 올해 3월에 인사이동된 것으로 파악된다. 이력과 경력만 놓고 보면 의사의 귀책사유를 의심하기란 참 어렵다.
여하간 결국 이번에도 아버지의 과실로 마무리될 것만 같다. 아버지를 애증하는 나이지만 한편으로는 애처롭다. 재수술 후 압통을 느끼며 한숨도 못 잤다는 소식을 들으니 더욱 짠해진다. 나도 그렇지만, 아마 아버지 본인에게도 이 세상은 정말 이해 안 되는 것 투성일 것이다. 여전히 본인은 왜 다쳤는지, 왜 재수술을 해야 하는지 모른다. 그보다 더 근본적으로 왜 이렇게 몸이 아픈지, 왜 부인과 자녀들은 나를 미워하는지, 이 늙어버린 몸뚱이로 무엇을 어떻게 먹고살아야 할 것인지 등 아마 막막함 그 자체일 것이다. 어쩌면 아버지는 이제야 실존적인 고민을 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실존은 생존을 기초로 하지만, '생존의 고민'만으로는 '실존적 고민'을 온전히 이해한다는 건 불가능에 가까울 것이다. 이성과 경험으로 이해되지 않는 넓디넓은 세상의 한복판에서 내가 이해할 수 있는 것들이 얼마나 있을까.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많다는 '자명함'을 알아가는 요즘, 가끔은 그냥 이해 받고 싶다.

| #9. 공허한 질문, 따듯한 답문 (0) | 2021.10.29 |
|---|---|
| #8. 영화 <더 테이블> (0) | 2021.10.28 |
| #6. 내가 조금 싫었던 날 (0) | 2021.10.19 |
| #5. 야속한 우리 가족 (0) | 2021.10.13 |
| #4. 주일 예배에 대한 고까운 생각 (0) | 2021.10.10 |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