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야곱, 속이는 자 그리고 움켜쥐려는 자

고민일지

by 고민의 쓸모 2024. 12. 2. 18:28

본문

1
"여러분, 야곱이 무슨 뜻입니까?"
목사님은 설교 중에 청중들에게 질문을 던지셨다. 나는 답을 알고 있었기에 자신 있게 '속이는 자'라고 작게 읊조렸다. 하지만 목사님이 원하셨던 답은 달랐다. '속이는 자'로 많이들 알고 있지만, 야곱이라는 이름의 원어적 의미는 '움켜쥐는 자'라는 것. 야곱이 형 에서의 발뒤꿈치를 잡고 태어난 이야기를 떠올리면, 이 이름이 더 잘 어울린다. 야곱은 움켜쥐려는 자로 태어났지만, 형에 비해 태생적으로 그리고 물리적으로 원하는 것을 가질 수 없었다. 그래서 결국 속이는 자가 되어야 했다. 내 생각에, 야곱의 이름은 죄의 한계 속에서 스스로를 구원하려 애쓰는 모든 인류의 보편적 모습을 대변한다.

2
움켜쥐기 위해 속이는 자가 된 야곱의 삶은 처절했다. 형과 아버지를 속여 장자권을 빼앗은 대가로 그는 20년 넘게 도망자 신세로 살아야 했다. 쫓기듯 집이라는 울타리에 나온다는 것은 치안이 전무했던 당시 상황으로 볼 때 공포와 두려움 그 자체였을 것이다. 괴한을 만나 죽임을 당해도 이상하지 않을 무법의 시대였으니까.
어머니가 시킨대로 삼촌 라반의 집으로 가는 길, 죽음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 참을수 없는 졸음과 배고픔, 그리고 지독한 외로움과 막막함이 밀려들었을 것이다. 

그때 야곱은 얍복강에서 천사와 씨름을 하고, 끈질기게 붙잡는 야곱에게 천사는 그의 골반뼈를 쳐서 어긋나게 한다. 하지만 그 끈질김은 결국 야곱의 이름을 바꾸어 놓는다. 새로운 이름은 '이스라엘', 뜻은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 자'였다. 사실 야곱이 겨룬 상대는 하나님이었다. 그리고 하나님은 졌다. 아니, 져주셨다. 왜 져주셨을까? 답은 간단하다. 하나님이 야곱을 사랑하셨기 때문이다. 당시 야곱은 회개하지도 않았지만, 하나님은 그를 찾으시고 상대해 주셨으며, 마침내 이름을 바꾸어 주셨다.


야곱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속여서라도 움켜쥐려 했지만, 결국 그 무엇도 제대로 움켜쥘 수 없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하나님이 야곱을 움켜쥐셨다. 그를 건져내시고, 그의 이름을 이스라엘로 바꾸셨다. 이후에도 험난한 삶은 계속되었지만, 야곱은 끝내 '야곱의 하나님'이라는 칭호를 얻으면서 그분이 움켜쥐시는 손에 안식한다.

3
"우리는 무엇을 움켜쥐고 있을까?"
예배 후, 린이와 나는 매드에스프레소로 향했다. 리브레 원두로 내린 커피, 너무 달지 않은 기본에 충실한 빵, 그리고 복층 구조가 매력적인 그곳에서 우리는 나눔을 가졌다. 내가 움켜쥐고 싶었던 것은 내 능력과 성과를 드러낼 수 있는 직장이었고, 린이는 내 주변은 쉽게쉽게 다 하는데 나는 왠지 어려운 결혼이었다. 더 나아가 직장은 성취와 인정으로, 결혼은 애정과 안정으로 의역할 수 있다면, 우리는 궁극적으로 '구원과 사랑'을 움켜쥐고 싶었던 것 아닐까? 답 없는 현실에서의 구원, 그리고 기쁨과 섬김이 충만한 사랑 말이다. 빵과 커피를 먹고 마시며 처음에는 우리가 움켜쥐고 싶은 것들을 나눴지만, 종국에는 그분이 우리를 움켜쥐고 있었음을 고백하고 있었다. 우리가 진정 움켜쥐어야 할 것은 그분 자체이다. 그분이 하신 구원과 사랑이다. 그분이 보여주신 자비과 평화이다. 그분이 양 손에 쥔 공의와 은혜이다. 가끔 느끼는 거지만, 빵과 커피로 함께하는 시간은 마치 매주 누리는 성만찬 같다. 오늘 하루 마주할 삶의 현장에서 내 언행과 해석이 조금이라도 나아진다면, 이는 분명 린이와 함께한 이 일상의 성만찬 덕분이리라 나는 믿는다.

 

에브라임아,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이스라엘아, 내가 어지 너를 원수의 손에 넘기겠느냐?
내가 어찌 너를 아드마처럼 버리며, 내가 어찌 너를 스보임처럼 만들겠느냐?
너를 버리려고 하여도, 나의 마음이 허락하지 않는구나!
너를 불쌍히 여기는 애정이 나의 속에서 불길처럼 강하게 치솟아 오르는구나.
(호11:8)

 

관련글 더보기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