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오랜만이다. <흉곽출구증후근, 4월 4일>의 글을 끝으로 한 달이 넘는 오늘에 와서야 글을 쓴다. 그동안 하루 평균 60시간 정도의 공부를 꾸준히 해왔다. 글을 쓰지 못했던 건 다음 2가지 이유에서다. 첫째는 매주 차일피일 미룬 탓(70%)이고, 둘째는 바쁜 와중에 굳이 이 글을 써야만 한다는 괜한 압박감에 나 스스로가 시달리기 싫기 때문(30%)이라는 셀프비평을 해보고 싶다. 여튼 그렇게 시간이 흘러흘러 15주차가 되었다. 그렇다. 첫 다짐 이후 약 100일, 3달이 흘러갔다.
2.
2일 전인 지난 주 토요일, 2차를 가기 위한 관문 중 하나인 1차 객관식 시험을 치렀다. 공식적인 합불 결과는 다음 달 15일에 나오지만 가채점을 할 수 있기에 점수를 매겼다. 결과는 불합격이다. 합격 기준 약 -2개 정도로 말이다. 충격이었다. 왜냐면 예상치 않았기 때문이다. 분명 결과의 예감을 넘어 체감을 했지만, 나의 '채점 오기'를 희망하며 채점을 두세번 반복했다. 이변은 없었다. 분명 그동안 기출문제 회독수만 따져보더라도 최소 4~5회독한 과목부터 최대 8회독까지 돌린 과목도 있었다. 1차 시험 2주 전부터는 2차 과목을 내려놓고 1차 준비에 올인했다. 엄격한 시간 제한을 둔 실전 연습도 진행했다. 그런데 합격점에 미치지 못하는 점수를 받았다. 2차에 가기도 전에 필터링된 것이다. 그 필터링이 나를 거를 줄은 미처 몰랐다. 정말 추호도 예상치 못했다. 아니 않았다. 왜냐면 내가 생각하기에 평균 60점을 넘길 수 있는 절대적인 물리적 공부량을 충분히 채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무엇이 문제였을까? 도대체 어떤 것이 문제였기에 절대평가인 1차 시험조차 넘어서지 못했던 걸까? 그리고 앞으로 무엇을, 어떻게 해야할까?
3.
몽유병 걸린 사람처럼 틀린 개수를 세고 또 셌다. 분명 의미 없는 셈을 반복할 뿐이었지만, 절망감은 연신 최고치를 경신했다. 이는 절망이라는 막연한 감정 혹은 관념이 현실로 구체화되고 있음을 의미했다. 그 끝은 나라는 인간의 바닥이었다. 그렇다. 수험은 오직 합격과 불합격이라는 이분법의 세계다. 한 치의 틈이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 거의 절대적인 냉엄함과 냉혹함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현대사회의 청년들은 이렇게도 잔혹한 시험의 세계관 앞에서 '정의와 공정, 평등' 따위의 순수한 가치들을 느끼곤 한다. 기회와 과정, 결과에 있어 외부요인(특히 인간)의 개입, 차별없이 문제가 요구하는 답을 찾으면 합격이라는 극강의 가치로 인정받게 되는 명료함과 분명함 때문일 것이다. 그 기준으로 부여되는 합격과 불합격이라는 낙인의 격차는 하늘과 땅 차이였다. 그렇게 나는 짓이기는 바닥의 세계를 경험하고야 말았다.
3.
부끄럽고, 답답하고, 원망스러웠고, 막막했다. 시험의 숱한 실패들을 경험했지만 이번에는 뭐랄까 차원이 달랐다. 인생의 회의를 넘어 신앙의 회의가 왔고, (솔직하게) 살아있는 것에 대한 회의까지도 찰나였지만 느꼈다. 불이 꺼진 방에 들어왔다. 전날 밤을 꼴딱 세어 거의 이틀이라는 시간을 깨어있는 상태인데도 잠이 오지 않았다. 눕고, 앉고, 엎드리고, 쪼그리고, 그리고 일어나 벽에 머리를 비비며 한숨을 내쉬는 등 몸을 한 시도 가만히 둘 수가 없었다. 잔혹한 현실을 힘겹게 현실을 받아들이고 나니 "이제 어떻게 할거냐? 아니 어떻게 살아갈거냐"라는 질문이 내 정신과 몸을 더욱 날뛰게 했다. 캄캄한 어둠이 날 사로잡았다. 방향감각을 완전히 상실했다. 방도가 도저히 떠오르지 않았다. 맹인이 된 것처럼 캄캄한 바닥만 더듬고 가끔 팔딱 뛸 뿐이었다. 인생이 망한 것 같았다. 과거의 수많은 일들과 사람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그들이 지금의 나를 보며 혀를 끌고, 곁눈질하고, 귓속말로 수군거리는 것 같았다. 그 모든 것은 나를 향하고 있었다. 숨고 싶어도 숨을 곳이 없어 숨막히는 시간이 흘러가고 있었다. 팔딱 뛰는 것도 지친 내가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쪼그린 채 기도라는 것을 중얼거리며 홀로 감내하는 것 뿐이었다.
4.
하나님은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사실 하나님은 내 실시간 신음을 자주 외면하곤 하셨다. 폰을 집고 카톡을 켰다. 가장 상단에 있는 린이의 톡방에 들어가 "자기야 나 어떻게 하지?"라고 썼다. 처음이었다. 그녀에게 진심으로 무엇인가 도움을 요청한 것은. 그렇게 썼다 지웠다를 몇 번 반복하다 이내 카톡을 닫았다. 부얶에서 소리가 들렸다. 시간을 보니 엄마가 깼다는 신호다. 시간을 보지 않아도 대략 새벽 3시 30분 전후라는 것을 나는 안다. 매일 그 시간에 일어나 아침 준비를 하시니까. 린이와 엄마, 그리고 가족을 생각하니 눈물이 흘렀다. 눈물의 의미가 무엇인지 정확히는 모르지만, 무능력하고 구제불능인 스스로에 대한 자책과 미안함, 부끄러움 등이 섞인 서글픔일 것이다. 흐느꼈다. 나를 보며 비웃는 사람들, 나라는 사람을 피할 수 있어 안도하고 있는 사람들, 그리고 이와는 정반대로 패배한 나를 피할 수 없는 이들까지...
오롯이 당사자인 나만 느낄 수 있는 그 차가운 시선들에 위축된 내게 미약하게나마 그와는 다른 하나의 다른 시선이 감지됐다. 내가 그토록 찾아 헤멘 그 시선, 내 삶의 의미와 가치를 새롭게 부여한 그 시선, 평생 떠나지 않겠다고 서원한 그 시선이었다. 어렴풋이나마 난 알고 있다. 사실 그 시선은 나보다 앞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음을. 숨기고 싶은 내 근원을 드러내고, 까발리지만, 내 모든 것을 이해하고 용납하고 권면하는 그 시선이 명확히 인지되자 어느샌가 쪼그린채 연신 그 이름만 불러대고 있었다.
5.
먼저 내 바닥을 발견하고, 사랑하는 이들의 시선과 영원한 그 시선까지 느끼고 나자, 흐느낌이 그쳤다. 어떻게 해야할지 대책을 마련해야 했다. 우선 노무사를 계속 도전할지 고민해야했다. 내 자신에게 하나만 물었다. "진짜 노무사 하고 싶냐?" 난 속으로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렇다고 말하자 더욱 하고 싶었다. 지난 공부를 생각하자 더더욱 하고 싶었다. 그리고 내 사랑하는 사람들과 그분의 시선을 생각하자 난 무조건 이 일을 해야만 한다라는 당위감마저 들었다. 물론 사랑하는 이들과 그분은 내가 무슨 일을 하더라도 응원하고 지지할 것이다. 청소일을 하든, 장사를 하든 말이다. 무슨 일을 하든지 간에 내가 생각하는 것은 하나다. 그 일에 내 자신의 정체성이 반영되는 것, 혹은 그 일에서 나의 철학이 발견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슨 일이든 상관 없다. 모든 일을 다 할 수 없으니 내가 만족하는 일을 하면 된다. 그러면 최소한으로 지속가능성까지 도모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난 노무사가 되어야겠다는 결론에 이른다.
6.
제목에 있는 '재기'라는 단어를 사전에서 찾아봤는데 참 재밌다. 뭐가 재밌냐면 내가 담고 싶은 메시지들을 한 단어에 두루 담고 있기 때문이다. 먼저 내가 담고 싶은 재기의 첫 번째 의미는 "역량이나 능력 따위를 모아서 다시 일어섬."이다. 다시 딛고 일어설 수밖에 없는 동기와 목적을 찾아야했다. 다음으로 두 번째 의미는 "재주가 있어서 인재가 될 만한 인품. 또는 그런 사람."이다. 여기서 재주란 기술적인 능력도 필요하지만, 나를 사랑하는 이들과 그 외 타인들에게 도움을 선사할 수 있는 최소한의 밥벌이 기술, 혹은 능력이기도 하다. 난 이 기술, 능력이 정말 필요하다. 세 번째 의미는 "쓸모 있는 사람."이다. 쓸모 있는 사람이 되지 않고 싶은 사람은 없지만, 쓸모 있는 사람이 되기란 참 쉽지 않다. 뛰어난 사람은 애초에 가망이 없음을 알았다. 난 그저 복음의 가치가 의미있는 삶의 구성력을 지닌 최고의 쓸모임을 전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마지막으로 네 번째 뜻은 "다시 기록함." 내가 알고, 배우고, 경험한 것들을 차곡차곡 기록하여 필요한 사람들과 나누고 싶은 사람이고 싶다. 기록하는 사람은 외압에 쉽게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
7.
1차의 실패로 인해 2차의 기회가 불발되었지만, 110일 후에 치루어질 2차 준비에 박차를 가하기로 결심했다. 금년 9월 2차 시험에서 나의 가능성을 중간 점검할 것이다. 현실은 내년에 이루어지게 되었지만, 내년의 미래를 오늘의 현실로 이루기 위해서는 지금 이 순간 무엇을 하느냐에 달려있을 것이다. 확실한 것은 오늘의 기회비용은 내일이라는 것이다. 천국의 현실을 오늘 이 시간 경험하지 못한다면, 내일에 가서는 더더욱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결코 내일의 현실을 경험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오직 우리는 오늘, 아니 지금 이 순간이라는 찰나의 현재만 주어져 있을 뿐이다. 그래서 우리에겐 시공간을 초월한 복음의 능력과 시공간 속에 내재된 카르페디엠과 메멘토모리의 지혜가 동시에 필요하다. 물론 핵심적인 전제는 전자가 후자를 관통해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의 현실을 제대로 살자. 그리고 난 반드시 죽는다. 그 허망한 삶의 운영 및 체계가 복음의 반석 위에서 세워지길 간절히 바랄뿐이다.
"의에 주리고 목이 마르니 내 잔을 채워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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